오! 수정 포스터

▲ 오! 수정 포스터 ⓒ 전주국제영화제

 
한국 독립영화 감독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을 꼽으라면 역시 홍상수라 답할 밖에 없다. 독립영화의 정의란 언제나 모호하지만 대규모 자본으로부터의 독립과 감독 의도의 관철이란 점에서 홍상수의 영화는 늘 독립적이었다. 메시지는 물론이요, 서사와 촬영, 배우들의 연기에 있어서까지 홍상수의 작품들은 독립영화의 관계성을 선명하게 드러내왔다.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가 '다시 보다: 25+50' 섹션으로 소개하는 <오! 수정>은 2000년 제작된 홍상수의 세 번째 장편이다. 전주국제영화제의 25주년, 한국영상자료원의 5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이 섹션에는 유독 2000년에 개봉한 작품이 많이 포함돼 있다. <오! 수정>을 비롯하여 봉준호의 <플란다스의 개>, 류승완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그렇다. 이들 세 감독이 향후 20년의 시간 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거듭났음을 고려하면, 2000년이 한국 영화사에 있어 특별한 해였음이 분명하다.
 
상업영화 감독으로 정점을 찍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봉준호와 류승완이다. 그러나 이들이 2000년에 발표한 데뷔작은 철저한 독립영화였다. 독립영화가 아직 자본이나 사회적 자산을 쌓지 못한 신예들로 하여금 개성을 펼칠 수 있는 장으로써 기능한다는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즉 독립영화판이 활성화되면 다양한 색깔을 지닌 신예들이 등장해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내보일 수 있다. 다양성을 근간으로 하는 예술, 또 영화판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이보다 나은 길은 없다. 독립영화를 한국 영화감독, 영화계, 나아가 한국 문화산업 전반의 자산으로까지 평가하는 이유다.

<오! 수정>을 소개하며 굳이 독립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푸는 건 홍상수의 특수성 때문이다. 2000년 당시만 해도 주목받는 젊은 감독이던 홍상수다. 그는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1998년 <강원도의 힘>에 이어 세 번째 장편으로 <오! 수정>을 찍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르는 동안 홍상수는 한국 영화팬 가운데 모르는 이가 없는 걸물이 되었다. 왕성한 작업량은 물론이요, 성실하며 꾸준하게 깊어지는 작품들,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의 평가, 꾸준히 수익을 올려주는 작품군이 그의 역량을 증명한다.
 
오! 수정 스틸컷

▲ 오! 수정 스틸컷 ⓒ 전주국제영화제

 
25년 한 자리 지켜온 거장의 세계
 
그러나 홍상수는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독립영화를 찍어낸다. 흥행에 대한 압박으로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밀어두는 법이 한 차례도 없었다. 영화는 물론이고 여러 대중예술 분과에서 인디 판의 도전자가 성공 뒤 정체성을 달리하는 사례가 속출하는 세상이다. 김기덕이 떠난 뒤 홍상수와 같은 작가는 더욱 귀해졌다. 제 자리를 지키며 제 작품세계를 깊게 하는 감독, 그렇게 서서히 모범이 되어가는 감독, 홍상수가 높이 평가돼야 하는 이유다.

<오! 수정>은 한 여자를 둘러싼 두 남자의 이야기다. 케이블TV 작가로 일하는 수정(이은주 분)과 PD 영수(문성근 분)는 요샛말로 하자면 썸을 타는 직장 내 동료사이다. 영수는 말이 PD지 나이가 많을 뿐 아니라 돈도 없고, 무엇보다 처자식이 딸린 유부남이지만, 무튼 그렇다. 다가서지도 멀어지지도 못하는 유부남 PD와 처녀 작가 사이의 미묘하고 불온하기까지 한 관계가 성인잡지를 훔쳐 보는 고등학생이 된 듯 관객의 정신을 붙들어놓는다.
 
다음은 재훈(정보석 분)이다. 배우의 실제 이름처럼 한 눈에도 귀티가 나는 잘 생긴 청년이 무려 기사가 끄는 차를 타고 수정 앞에 나타난다. 그는 한 눈에 그녀에게 반한 듯 다가서고 그녀가 제 생각보다 순수한 것 같다는 사실에 깊이 빠져든다. 무엇보다 영화의 백미는 남과 여의 서로 다른 욕망을 적나라하게, 그러면서도 훔쳐보듯 볼 수 있다는 것인데, 재훈의 욕망이란 여자의 처녀성을 취하는 일이다. 말하자면 제가 그녀의 첫 남자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반면 수정은 재훈의 재력에 거스를 수 없는 끌림을 느낀다. 속물임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그에게 접근하는 일엔 웬만한 첩보요원 못잖은 작전이 필요하다.
 
재훈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제가 관심 있는 여자와 잘 되어가는 모습이 불쾌한 선배 영수와 재훈이 생각하는 것과는 적잖이 다른 모습을 가진 수정, 그리고 돌진하는 재훈의 모습이 마치 세 개의 각진 모서리를 가진 바퀴처럼 덜컹덜컹 돌아간다. 일상성 가운데서도 적나라함을, 마치 포르노와 같은 노골적 욕망묘사를 무려 2000년도에 나온 <오! 수정>이 감행한다. 홍상수는 흑백 화면을 통하여 이 적나라함에 완충지대를 제공한다.
 
오! 수정 스틸컷

▲ 오! 수정 스틸컷 ⓒ 전주국제영화제

 
한 여자와 두 남자, 적나라한 욕망의 교차
 
<오! 수정>은 초창기 홍상수의 영화적 문법이 정립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는 모두 5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와 3부는 남자의 기억으로, 2부와 4부는 여자의 기억으로 채워진다. 같은 사건이 주체의 달라짐에 따라 완전히 뒤틀리는 순간도 여럿이다. 이해라 믿었던 것이 오해이고, 우연으로 여긴 게 계획이었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5부에 와서야 서로 다른 세계가 맞닿는다.
 
저 구로사와 아키라가 <라쇼몽>에서 감행했던 주체에 따라 달리보이는 시각의 영화적 환기는 <오! 수정>에 이르러 홍상수적 쓰임을 찾는다. 어쩌면 홍상수적 쓰임이야말로 장예모의 <영웅>이며 리들리 스콧의 <라스트 듀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 못잖게, 혹은 그보다 더 큰 효과를 누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대단할 것 없는 일상에서 보다 많은 거짓말과 합리화를, 위선까지도 드러내고는 하니까 말이다.
 
홍상수는 특별하다.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 이소룡이나 성룡, 차이밍량이나 우디 앨런, 또는 롤랜드 에머리히 같은 이에게 붙는 칭호를 그에게 붙여도 좋을 정도. 홍상수라는 이름 뒤에 영화를 붙여 홍상수 영화라 말하면 다른 이가 알아듣는다. 곧 스스로 브랜드를, 약간 과장하자면 장르를 이루었다 해도 좋다. 척박하기 짝이 없는 한국 독립영화판에서 이를 일궈낸 홍상수다. 여기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백재호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에게 홍상수 영화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었다. 필름에서 디지털로, 유명배우에서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로, 또 서사를 이끄는 방식이며 주제의식과 장치들에 이르기까지 홍상수는 변하지 않으면서도 변화를 거듭해왔다. 그가 독립영화판에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전주국제영화제 4일 오후 전주 '영화의 거리'에서 백재호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이 현 정부의 영화예산 삭감에 저항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전주국제영화제 4일 오후 전주 '영화의 거리'에서 백재호 한국독립영화협회 이사장이 현 정부의 영화예산 삭감에 저항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 김성호

 
맞춰지는 홍상수 영화의 조각들
 
백 이사장은 외로 유명 프로그램 < 나는 SOLO >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백 이사장은 "얼마 전 < 나는 SOLO >의 한 장면을 두고 '홍상수 영화 같다'라고 표현한 SNS 게시물이 많은 공감을 받았다"고 말했다.

대중이라 불러도 좋을 TV프로그램의 시청자들이 천만관객은커녕 최근엔 수천 관객에 그치기 일쑤인 홍상수 영화에 대하여 마치 브랜드처럼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뜻이겠다.
 
백 이사장은 "꽤 많은 수의 신진 영화인들은 '홍상수 영화' 같은 또는 '홍상수 영화' 같지 않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며 "홍상수 감독이 지금까지도 꾸준하게 자신의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이유는 이미 그가 '홍상수 영화'라는 브랜드를 만드는데 성공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석했다.
 
이어 "그가 90년대 후반이 아닌, 멀티플렉스와 OTT, 유튜브의 시대에 데뷔했다면, 브랜드를 만드는데 성공했을지 의문이지만, 어쨌거나 그는 데뷔 후 30여 편의 영화를 꾸준하게 만들어 내고 있다"며 "최근엔 관객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인데, 인상적인 점은 줄어든 관객에 맞춰 프로덕션의 크기도 줄이고 있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 전주국제영화제

 
한국이 넥스트 홍상수를 만날 수 있을까
 
백 이사장은 그럼에도 홍상수의 존재가 오늘의 독립영화계에 던지는 시사점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보통 관객이 줄어들면 관객을 늘리기 위해 대중적인 방식을 시도하기 마련인데, 홍상수 감독은 제작비를 줄인 만큼, 더욱 더 자유롭게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며 "독립영화인에게 '홍상수 영화'가 서사나 촬영, 배우들의 연기뿐만 아니라 제작과 배급 방식에도 시사하는 바가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덧붙였다.
 
홍상수라는 굳건한 브랜드조차 흥행에서 고꾸라지는 현실, 그 현실 가운데서도 어떻게든 나가야만 하는 독립영화인들에 대한 우려와 응원이 그의 말 가운데 진하게 묻어났다.

다시 25년이 흐른 2049년이 되어 전주국제영화제와 한국영상자료원이 '50+75'전을 연다면, 그때 한국 독립영화계는 누구를 대표주자로 내보낼 수 있을 것인가. 한국독립영화의 다음 브랜드는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전주국제영화제 기간 동안 영화의 거리 가운데 피켓을 들고 선 독립영화인들의 외침이 허공을 떠돈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전주국제영화제 JIFF 오수정 홍상수 김성호의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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