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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삼각산 백운대를 뒤로 하고 서 있는 봉황각. 당시에는 아마도 첩첩산중이었을 것이다. 독립의지를 교육하는 곳이었으니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산중에 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봉황각 멀리 삼각산 백운대를 뒤로 하고 서 있는 봉황각. 당시에는 아마도 첩첩산중이었을 것이다. 독립의지를 교육하는 곳이었으니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산중에 짓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이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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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종통을 이어받은 손병희는 조선정부의 탄압을 피해 적국인 일본으로 피신했다. 미국으로 가고자 했으나 뱃길이 없었다. 일본에 머물며 이상헌이란 가명을 쓰고 호남 출신의 부자인 양 행세하였다. 일본 정보기관의 감시망을 피하고자 한 것이다. 

그동안 국내의 동학의 관리는 이용구에게 맡겼다. 그의 제자로서 동학혁명전에도 참여했던 인물이다. 동학혁명 좌절 후 해월이 처형될 때 함께 투옥되었으나, 그후 변신하여 사면을 받고 제멋대로 동학을 진보회로 고치며 악질 친일파 송병준의 일진회와 통합했다. 그리고 러일전쟁 때 일본군에 적극 협력하였다. 이 같은 행적으로 세간에서는 동학이 친일종교로 전락했다고 알려졌다.   

손병희는 이용구를 도쿄로 불렀다. 그동안 자신에게 보내온 보고서의 진위를 따지고, 친일매국의 잘못을 뉘우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용구는 손병희가 아끼던 측근 중의 측근이었기 때문에 잘 설득하여 참다운 동학교인으로 되돌리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긴급히 이용구를 불러가지고 "도대체 어쩌자고 보호선언이란 망동을 했느냐"고 엄중한 책망을 하니 이용구는 "현하의 한국은 보호독립이 시의에 적합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보호를 받으면 독립이 아니요 독립을 하면 보호가 불필요한 것인데 어떻게 보호독립이란 말이 성립될 수 있겠느냐" 한즉 "선생님 걱정 마십시오. 제가 이등에게 '안네기'를 걸었습니다. 이제 적당한 때가 닥치기만 하면 이등은 나가 자빠질 것입니다."

"이등이 어떤 사람인데 그대에게 안네기를 걸렸겠나? 바로 그대가 걸렸으면 걸렸지!"(33인 중 1인이신 고 라용환 선생의 <일진회 회고록>에 의함)했다는 것이다. (주석 1)

손병희는 고심 끝에 동학교단의 수습과 교도의 재조직을 위해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1905년 12월 1일을 기하여 이제까지의 동학이라는 교명을 천도교(天道敎)로 바꾸어 선포하였다. 1860년 최제우가 제세구민의 큰 뜻을 품고 동학을 창도한 지 45년 만의 일이다. 천도교라는 교명은 <동경대전>에 있는 "도측천도(道則天道)요 학측동학(學則東學)"이란 구절을 인용하여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한 것이다. 

손병희는 동학이라 불리던 교단을 '천도교'라는 근대적 이름으로 세상에 반포하면서 <대고천하(大告天下)>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포덕 46(1905)년 을사에 성사 동학 이름을 고쳐 천도교라 하니라. 원래 동학이란 이름이 서학 아닌 것을 밝히고자 함이요, 실상 이름은 아닌 고로 동경대전에 이른바 '도인즉 천도요, 학인즉 동학'이라는 뜻을 취하여 천도교라 고치니라.

손병희는 동학의 전통적인 가치인 보국안민의 개념을 천도교의 교리체계에 흡수하여 '성신쌍전(性身雙全)'의 철학을 확립하였다. 

성신쌍전 : 이 역시 대신사의 말씀하신 보국안민·포덕천하·광제창생의 정신을 유출하여 말한 것이니 보국안민은 신변의 사(事)인데 신변을 표준한 것이며 포덕천하는 우주·대도·대덕의 신종교를 이름인데, 이는 성(性) 즉 도(道)에 속한 것이니 이것이 가장 천도교의 특색되는 바라. 

원래 천도교는 물(物)과 심(心)을 이원(二元)으로 보지 아니하고 오직 일원(一元)되는 지기(至氣)의 발작으로 물과 심이 생겼다 믿는 점에서 천도교는 유심(唯心)에 속한 것도 아니며 유물에 속한 것도 아니요, 오직 지기일원실체(至氣一元實體)인 한울을 그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작용의 점에 있어는 물심이 병행하는 것으로 보아 물심 이자(二者)를 총심 수행함을 성신쌍전이라 이름하고 그리하여 그가 행위상에 나타날 때에 성변사(性邊事)와 신변사(身邊事)를 달리 말하게 되는 것이다. (주석 2)
손병희가 1901년 3월 일본으로 피신하기 전인 "1899년 3월 10일 박인호에게 춘암이란 도호를 내렸다. '춘(春)'은 도를 창명한 시기가 춘삼월이며 박인호가 앞으로 성공할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했으며, 동시에 박인호를 독려하기 위함이었다." (주석 3)

춘암은 교주의 망명 중 흩어진 도인들을 수습하면서 동학의 재건에 나섰다. 관의 추적을 피하고자 충남 당진, 얼마 후에는 공주와 청양 사이에 있는 정산말티(定山斗峙)로, 1900년 7월 10일에는 경상도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박인호가 동학의 지도자들과 함께 동학 재건활동을 펼쳤던 중심지는 '정수(定水)'라는 곳이었다. 이곳은 광주 남한산성의 대우산 밑에 자리 잡은 산촌마을로, 양지와 이천, 광주와 용인 네 골짜기의 접경지대로 사방에서 10리 씩 올라서야 당도할 수 있는 곳이었다. 

또한 사방이 뚫려 있어 지형적으로 도피하기에 좋은 지리적인 조건을 갖고 있었다.

박인호는 이곳을 중심으로 재건활동을 펼쳤고, 천도교 개편 이후에도 이곳에서 자주 머물렀다. 박래원도 이곳에서 오랜 기간 거주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주석 4)

손병희는 춘암 등의 헌신적 노력으로 국내의 동학조직이 신장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1904년 4월 박인호·홍병기 등 간부들을 도쿄로 불렀다. 이 자리에서 도인들의 정신적 단합을 위하여 단발을 시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주석
1> 백세명, <갑진혁신운동과 동학>, <한국사상총서 3> 414~415쪽, 한국사상 연구회, 1973.
2> 이돈희, <천도교창건사>, 제3편, 66~67쪽, 1933.
3> 정을경, 앞의 책, 117쪽.
4> 박대원, <풍운중의 나의 일생>,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정을경, 앞의 책, 118쪽, 재인용.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박인호평전, #박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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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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