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25일) 낮부터 봄비가 내렸다, 어제 낮까지 꼬박 24시간가량을….
봄에 내리는 비는 다른 계절의 비와는 조금 다르다. 촉촉하게 내린다. 가을에는 비를 끌고오는 바람이 다소 세차게 분다. 모질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가을비는 조금은 거칠게 느껴진다.
하기야 겨울의 초입에 내리는 눈은 마구 휘몰아치며 내리는 것이 보통이다. 오히려 한겨울에 내리는 눈은 소복소복 내리는 경우가 많다. 따지고 보면 봄비가 새악시처럼 조용히 내리는 것은 한겨울에 소복히 눈 내리는 때부터 연습해 온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천지자연은 늘 비슷해 보이지만 실상은 제각각의 개성이 숨겨져 있다. 일 년 365일이 같은 365개의 동일한 날의 나열이 아닌 것이다. 늘 운기생동(運氣生動)하는 자연의 365개의 개성 있는 날들의 불규칙적 조합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불규칙이라는 것도 완급(緩急)을 조절하는 내적(內的) 질서(秩序)를 유지한 채 말이다.
동방의 고대인들은 비를 '하늘에서 내려주는 정액(精液)'으로 파악해 왔다. 특히 이처럼 촉촉하게 내리는 봄비는 더욱 그렇다. 봄에 하늘에서 내려주는 정액을 땅에서 받아들여 만물을 소생시킴으로써 뭇 생명들을 나고 자라게 하니, 하늘은 아버지요 땅은 어머니라는 생각이 우리 조상들에게 들었을 것이다. 참으로 소박한 생각이며 거짓이나 허위가 없는 순수한 사고방식이라는 느낌을 갖는다.
"가만히 앉아서 비 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니?""응, 나는 빗소리 듣는 것을 좋아해~""그래? 서울에서도 비 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응, 천정에 떨어지는 빗소리, 내 차에 앉아서…."빗소리가 좋기에 함께 나누려고 친구에게 전화통화를 한 내용이다. 차의 천정에 내리는 빗소리라도 들으려는 친구의 노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러나 내가 말한 빗소리는 그게 아닌데….
그제 비가 내리기에 연구실에 있던 난(蘭)을 밖으로 내어 봄비를 맞게 했다. 여름의 장맛비와 가을비를 맞추면 안 되지만 겨울 햇볕과 봄비는 보약이라고 한다. 실제로 길러보면 느낄 수 있다. 봄비를 맞으며 지낸 난들은 싹도 더 잘 틔우고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었다. 봄비는 만물을 생장시키는 효험을 갖고 있는 듯 하다. 마치 어릴 때 배 아프면 쓰다듬어 주시던 할머니의 약손처럼….
오늘 새벽에 눈을 떠 밖을 보니 뽀얀 안개가 가득하다. 어제까지 내린 비가 따뜻한 봄기운에 포근한 안개를 만드는 모양이다. 밖으로 나가보니 멀리 켜져있는 가로등이 뿌옇게 번져 보인다. 안개가 짙어서 건너편의 검은 숲이, 검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희뿌옇게 보인다. 바람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다. 조용하다. 가끔씩 "툭, 툭" 소리가 난다. 어제까지 내린 비가 나뭇가지에 스며있다가 새벽 안개를 맞아 떨어지는 소리인 모양이다.
건너편 숲에서 조심스럽게 노크하는 소리가 연해 들린다.
"톡톡톡톡… 톡톡톡…" 나무줄기에 구멍을 내고 서식하는 딱다구리 류의 새가 나무를 쪼는 소리다. 하기사 모든 것이 때가 있는 것이니 저 숲 속의 새도 이 이른 새벽에 자기의 둥지를 만드느라 바쁘겠지. 이처럼 습도가 높을 때 부지런히 나무를 쪼아야 둥지를 만들기가 수월하겠지.
"톡토도독 독톡톡…" 쪼는 각도가 다른지 소리가 달리 들린다. 가끔씩 맺혔던 빗방울이 떨어지는 속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이른 새벽부터 열심히 둥지를 만드느라 나무를 쪼아대는 소리를 들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