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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로아티아 최초의 국립공원이며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인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의 겨울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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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 의자에 잠시 앉았다 가는 것과 다름없는 인생. 소유욕에 대한 통제력을 풍경이 일깨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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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You're my friend. You're my new friend!" 

오후 늦은 시각에 도착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게트라이데 거리(Getreidegasse)에서 한 중년 남자를 만났습니다. 느긋하게 그와 얘기를 나눌 짬이 허락되지 않은 형편에 만난 인연에 아쉬움을 묻혀 작별인사를 건네자 그가 내게 한 말입니다.  

베토벤이 피아노 소나타 제14번, 일명 <월광소나타>를 작곡했던 곳이라는 슬로바키아(Slovakia)의 브라티슬라바(Bratislava). 다뉴브강 북쪽의 구시가지 뒷골목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남녀 두 사람이 막 레스토랑에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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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의 뒷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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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드셨군요?"

저는 눈이 마주친 그들에게 겸연쩍은 마음을 숨기고 눈인사에 한 마디 인사말을 덧붙였습니다. 

"아침이라고요? 아니에요. 우리는 술을 마셨어요."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도 안 된 시각이었습니다. 

"아니, 아침부터 부터 술을 마셔요?"

두 사람은 먼저 소리 내어 웃고 답했습니다.

"우리는 어제저녁부터 술을 시작했답니다. 지금 끝난 거지요."

미카엘라(Michaela)와 야로슬라바(Jaroslav)라고 자신들을 소개한 그들은 지금 막 나온 집의 2층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곳에 정말 밤새워 술 먹기 좋은 곳이에요. 2층에 멋진 공간이 있어요."

밤새워 술을 마셨다는 두 사람. 하지만 취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You're my friend. You're my new friend!"

길 위에서의 수다를 마치고 돌아서면서 게트라이데 거리에서 중년 신사가 했던 말을 이번에는 내가 미카엘라와 야로슬라바에게 했습니다. 

이렇듯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갑옷을 벗어 놓은 마음으로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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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저녁부터 1박2일간 술을 마시고 오전에 술집을 나온 슬로바키아의 두 사람과의 길거리 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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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체코, 오스트리아, 독일,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헝가리, 슬로바키아, 폴란드. 

이번 3월의 동유럽 여행은 10개국에 걸쳐 3681km를 이동한 강행군이었습니다.

결혼 29주년의 아내를 위한 여행이었지만, 나의 오래된 습관인 탐사형 여행에 대한 버릇을 버리지 못해 나의 취재여행에 아내가 보조로 동행하는 모양새가 됐습니다. 하지만 여행길에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은 함께 누렸습니다. 

책의 편집을 막 끝내고 남편과 딸을 두고 혼자 떠나온 프리랜서 편집자, 전직 과정에서 허락된 짬을 활용하여 여행길에 오른 노총각, 30살의 딸이 은퇴한 아버지를 동행해 나란히 한국을 떠난 부녀, 엄마를 가이드하기 위해 함께 길을 나선 프로그래머, 부인에게 자유를 허락하기 위해 홀로 길 위에 선 사려 깊은 60대 후반의 남편, 며느리가 출산휴가를 받은 틈을 타 함께 동행한 노부부...

여행길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여행을 떠난 나름의 이유가 각각이었지만 모두가 두 가지 특징의 여행자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찬찬히 반추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래의 삶을 좀 더 자신의 가치에 충실한 삶을 살도록 하는 기반이 됩니다. 타인의 시선을 기준으로 한 선택보다 자신 내면의 울림에 따른 선택을 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지지요. 둘째는 타인을 새롭게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프리랜서 편집자가 말했습니다.

"혼자인 이 여행이 온전히 나를 돌아보게 하는군요. 한국에 돌아가면 나의 이 여행을 위해 직장 다니면서 8살짜리 딸을 돌보느라 정신없을 남편에게도 혼자 여행을 다녀오라고 해야겠어요. 평소 히말라야 트레킹을 가고 싶어했거든요."

노총각은 여행길에서 만나는 감상을 사진에 담아 마음을 새롭게 발견된 옛 직장의 여자 후배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내곤 했습니다. 이 여행이 끝나면 두 사람은 한결 거리가 좁혀져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크로아티아 자다르에서 만난 커플은 열흘간의 신혼여행 중이었습니다. 두브로브닉, 스플릿, 자다르 등 아드리아 해의 반짝이는 해안을 따라 여행하면서 막 시작한 인생의 동행을 설계하고 있었습니다. 

플리트비체 호수(Plitvice Lakes)가에서 느긋하게 겨울 숲을 바라보고 있는 태국의 두 남녀도 신혼여행자였습니다. 두 사람은 한 달 기한으로 동유럽을 돌면서 자유여행자의 신분으로 평생을 함께할 인생의 여정을 짜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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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달간의 일정으로 동유럽을 여행 중인 태국의 신혼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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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맬버른에서 온 헤다(Heatha)가족은 다른 좀 더 색다른 이유로 3주간의 늦겨울 유럽 여행을 택했습니다.

"남편과 저는 사냥용품 도매상을 운영하고 있는데 이 시기가 시간을 내기가 좋기도 하지만 지금이 유럽을 여행하기가 가장 적기에요. 만약 한여름에 우리 네 식구가 유럽을 여행한다면 지금보다 2~3배는 비싼 비용이 필요할 거예요."

플리트비체 선상에서 만난 헤다네 가족은 오스트리아로 입국한 다음 렌터카로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해안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스플리트에서 렌터카를 반납하고 배로 아드리아 해를 건너 이탈리아로 들어간 다음 열차로 다시 서유럽을 북진할 계획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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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에서 온 헤다씨 일가의 동유럽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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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욕망의 충돌과 좌절로 생긴 생채기를 다독이는 기회일수도, 양 갈림길에서 어느 길로 발을 들여놓아야 될지에 대한 고민의 답을 얻는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숲속에서는 숲이 보이지 않습니다. 숲을 온전히 바라보기 위해서는 숲을 벗어나야 합니다. 내속에서 나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나를 벗어나서 나를 바라보는 기회가 여행이지요.

우리 선조들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자신 소유의 집안 정원에 원하는 풍경을 만드는 대신 벽에 창을 냈습니다. 풍경이 그리우면 들창을 올리고 멀리 앞산을 바라봤습니다.

바로 차경(借景)입니다. 내 정원에 모든 자연을 옮겨서 재현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앞산의 풍경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지만 모든 사람의 것이기도 합니다. 

소유하기 위해 유한한 인생의 시간을 소비하는 대신 오직 사랑하기위해 그 시간을 쓰는 것, 여행은 사람들에게 이 차경의 지혜를 일깨워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