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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문화 행사 또는 활동을 심층적으로 담는다. 교육과 문화는 지역의 잠재력이자 지역민들의 삶의 만족도를 대변하는 분야다. 이에 주간함양은 함양 안에서의 수많은 교육·문화 활동이 독자들에게 생생하고 매번 신선하게 체감될 수 있도록 ‘교육·문화 포커스’ 코너를 마련했다. 매월 둘째 주, 셋째 주 교육·문화 현장에 한걸음 더 들어가 담아낸 이야기를 흥미롭게 전하고자 한다. [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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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이번 교육·문화 포커스에서는 한국전쟁 당시인 1951년 12월 함양군 휴천면 금반리에서 벌어진 '금반리합동작전'(또는 금반전투)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민·관·군이 합동작전을 펼쳐 빨치산으로부터 휴천면을 구해낸 중요하고 의미있는 지역의 전투 역사이지만 지역내에서도 많은 조명을 받지 못했다.

금반리합동작전을 동시에 이끌었던 최시문 휴천지서장은 박복원 선생과 함께 빨치산에 협력한 것으로 오해받은 600명의 휴천면민의 대량학살을 막은 공신이기도 하다.

이 위대한 전투와 관련해 김일웅 전 휴천향토문화연구회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해당 내용은 <함양군사>, <휴천면지>, 마지막 빨치산인 정순덕의 자필기록, 향토수호전적비 비문, 당시 살아있던 다수의 증언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밝힌다.

위급한 상황에 놓인 휴천면
 
의병특공대가 휴천면 일대 고지에서 병력을 나누어 휴천면을 방어했다.
 의병특공대가 휴천면 일대 고지에서 병력을 나누어 휴천면을 방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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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25일 오전 4시 선전포고도 없이 북한 김일성은 소련·중국의 지원을 받아 남침을 감행했다. 이에 당시 한국군은 파죽지세로 낙동강까지 후퇴하였고 전선이 경상도도 채 남지 않은 백척간두의 위기로 몰린다.

이후 1950년 9월15일 UN연합군 맥아더 사령관이 밀어붙인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일시에 전황이 바뀌었다. 남쪽 깊숙이 진격한 북한군의 주력부대는 퇴로가 막혀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하자, 지리산에 숨어들어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빨치산이 된다.

이로 인해 당시 함양군 휴천면 금반리에는 낮에는 태극기가 밤에는 인공기가 나부끼는 위급한 상황에 놓인다.

이러한 와중에 최시문 지서장과 순경 30명, 최병택 의병특공대장을 비롯한 의병특공대 120명(휴천면을 지키기 위해 지원한 젊은이들)이 자원하여 함양군 휴천면 일대의 대포고지, 진관고지, 팥두재고지, 석정고지와 지서 등 중요한 고지에서 30여명씩 병력을 나누어 휴천면을 방어하고 있었다.

김일웅 전 회장은 "모든 고지에는 튼튼한 대나무를 깊이 박아세워 동앗줄로 묶어 3중 울타리 방어막을 치고 그 안에 참호를 파고 참호벽은 돌로 쌓아올려 빨치산과 혈전을 벌였다"며 "당시 개인화기라고 해봐야 일본군이 사용하던 카빈소총이 전부였지만, 고향산천인 휴천면을 지키기 위한 기개와 애향심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꺾일 줄 몰랐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리산, 법화산, 삼봉산의 산세가 높고 험하며 빨치산의 수가 아군보다 훨씬 많았고 무기도 아군보다 월등해 방어작전은 답보상태로 이어졌다. 그러던 중 1951년 12월10일 덕유산에서 북한의 최정예부대 소속 빨치산 238명이 월평 위쪽의 삼봉산으로 주둔지를 옮기려 했다.

부대를 이동하려면 목현 뒤편의 화장산과 목현지서와 휴천종합운동장을 지나야 했는데, 빨치산 부대는 화장산을 넘어 목현지서는 우회를 하여 선부골로 돌아 금반고지와 석정고지를 향했다. 이때 석정고지를 지키고 있던 30여명의 순경과 의병특공대 대원들은 곧바로 고지를 사수하기 위해 총을 쏘면서 맹렬히 저항했지만 중과부적으로 고지에서 후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김 전 회장은 "이후 석정고지의 아군후퇴를 전투에 승리를 한마냥 빨치산부대는 의기양양하게 석정고지를 넘어 금반초등학교를 지나 유유히 금반리로 들어서 양식을 약탈하기 위해 머물렀다"며 "이에 금반주민들은 공비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술과 음식을 대접해 안심시키고 몰래 지서에 신고했다"고 밝혔다.

의병특공대가 휴천면 일대 고지에서 병력을 나누어 휴천면을 방어했다.

10시간 동안 이어진 혈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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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를 받은 최시문 지서장과 최병택 의병특공대장은 함양비행장에 주둔 중이던 군에 급히 도움을 청한다. 때마침 함양비행장에는 충청도 전투에서 패하고 대대장을 잃은 백야전사령부 소속 1개 중대병력 약 100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요청을 받은 군 100명, 의병특공대 120명, 순경 30명을 합한 아군병력 250명이 치밀한 정보와 작전을 거치고 금반주민들의 협조하에 금반리 음촌마을의 건너편 들판에서 적의 부대를 완전히 포위한다.

1951년 12월10일 정오 몰래 신호하여 주민들을 빨치산과 분리를 한 후 속칭 '금반리합동작전'의 서막을 올렸다. 아군 250명 대 적군 238명의 서로 죽고 죽이는 설욕의 장이 펼쳐진 것이다.

김 전 회장은 "쌍방간의 혈투는 무려 10시간을 이어갔다. 완벽한 포위작전 속에서도 전투경험이 풍부한 적군은 수없이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한 활로를 뚫어 몇몇은 살아남아 마상마을길로 혈로를 만들고, 진관고지 옆길을 따라 법화산으로 실낱같은 생명을 이어갔다"며 "총소리가 잦아들고 밤을 새운 다음날 아침 적의 시체는 금반리를 덮었고, 냇물은 핏빛으로 변하여 1주일 동안을 붉게 흘렀다고 한다"고 말했다.

전투결과 빨치산 사살 180명, 생포 40명, 무기 240정(향토수호전적비 비문 참고)의 결과를 얻었다. 아군 피해는 의병특공대 1명, 순경 1명이 순직하였으며, 금반주민들은 모두 무사했다.

김 전 회장은 "단 한번의 민·관·군 합동작전으로 적의 주력부대를 완전히 괴멸시켜 버려서, 휴천면에 빨치산이 얼씬도 못하게 만들었던, 대승을 넘어선 혁혁한 대첩이었다"라며 "지금 순간 되새겨 볼 일은 이름 없는 의병특공대 120인도 고향인이요, 순경 30명도 우리의 고향 선배들이라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휴천의 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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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70여년이 지난 시점, 휴천을 지켜낸 이들의 정보를 찾는데 어려움이 많았다며 김 전 회장은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는 "군인이 아니기에 군번도 없어 어떤 공적을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으니 더욱더 안타깝다. 3년 동안 이 영웅들의 행적을 찾으러 백방으로 발품을 팔고 찾아보았지만 힘들었다"라며 "알아낸 건 최병택 의병특공대장이 휴천면 임호마을인으로 고향인 휴천면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의병을 모으고 대장이 되어 휴천면의 모든 전투에서 휘하 부하를 독려하며 선두에서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싸워 끝끝내 휴천민을 지켜내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전쟁이 끝나고 최병택의 가족과 후손들도 임호마을을 떠나 그분의 묘소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당시 지서장이었던 최시문의 공적도 강조했다. 최시문 지서장은 백전면 출신으로 '금반리합동작전' 8개월 전 1951년 2월6일 운경 박복원 선생이 휴천면민을 살리는 현장에서 휴천지서주임의 자격으로 오익경 연대장의 휴천인 1000명을 처형하니 명단을 제출하라는 <군작전1급비밀>인 명령을 거부했다. 전시상황시 명령 불복종은 사형에 처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위험하면서도 위대한 선택이었다.

김 전 회장은 "최시문 지서장은 박복원 선생과 함께 600명의 휴천인을 구한 1등 공신이다. 당시 명령 거부는 정말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짚었다. 이어 "또 한국전쟁 동안 휴천면 빨치산 토벌의 선두에 서서 의병특공대 120명과 순경 30명을 지휘해 목현지서를 중심으로 산꼭대기에 각각의 고지를 구축해 휴천을 지켜낸 최고의 사령관"이라며 "금반전투에서 민·관·군의 합동작전을 이끌어 내었고 전병력을 지휘해 완벽한 승리를 만들어낸 영원한 영웅"이라고 격찬했다.

최시문 지서장에 대한 행적을 찾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김 전 회장은 "처음에는 최시문이 경찰신분이었기에 이분의 행적을 찾기는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현 휴천지서장의 도움을 받아 함양경찰서와 파출소에 그분의 행적이 기록된 자료를 찾아봤는데 단지 짧게 한 줄 '경사 최시문이 있었다'라는 기록이 전부이고 어떤 자료도 없다고 한다"며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이분들과 같은 시대의 아픔을 겪은 분들이 휴천면에 몇분이 생존해 있어, 목격담과 실화를 알려 주셨던 동시대의 어르신이 계신다는 사실이다"고 말했다.

현재 휴천면 목현리에는 2006년에 세워진 금반리합동작전을 기리는 '향토수호 전적비'가 자리하고 있다. 휴천의 후배들이 선배들이 지켜낸 휴천면의 영광인 금반리합동작전을 기리고자 세웠다고 전해진다.

끝으로 김 전 회장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잊혀지고 있는 영웅들의 업적들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만이 다음의 역사도 올바른 방향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며 "이러한 자랑스러운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 전할 수 있어 기쁘다. 앞으로도 잊힌 영웅들의 행적을 찾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겠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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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함양뉴스에도 실렸습니다.


태그:#금반리, #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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