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01 12:16최종 업데이트 24.06.01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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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4일 광복절을 하루 앞두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독립 관련 퍼포먼스가 열리고 있다. ⓒ 연합뉴스

 
일제강점기는 암울한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3·1운동은 역동적이고 희망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윤기현·강경화처럼 거의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한국인들이 '대한독립 만세', '조선독립 만세', '일본 나가라'를 목청껏 외쳤다. 1919년의 이 운동의 결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지기는 했지만, 조선총독부의 억압을 종식시키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이 운동은 밝은 느낌을 준다.

기존 국가권력을 무너트리지 못한 시민혁명이나 민중혁명을 실패한 혁명으로 규정하는 학자들이 많다. 이는 모든 것을 지나치게 국가 중심주의로 사고하는 경향의 산물일 수도 있다.


1960년 4·19혁명, 1987년 6월항쟁, 2016년 촛불혁명 등에서 확인됐듯이, 자연발생적으로 봉기하는 민중이나 시민이 국가권력을 반드시 넘보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억압에 대한 거부나 응징인 경우가 많다. 억압하는 세력에게 타격을 주고 정신 깨임을 시키는 선에서 만족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것이 국가권력의 해체로 연결되지 않았다 하여 '미조직된 민중의 한계'라는 식으로 평가절하하는 것은 경솔하다.

인류 역사에서 지금의 국가 형태가 출현한 것은 몇 천년밖에 되지 않는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는 국가의 존재 의의가 약해지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국가의 외피를 쓰지 않고도 웬만한 국가 이상의 역량을 행사하는 조직들이 고개를 들고 있다. 모든 것을 국가 중심으로만 이해하려 들면, 역사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 자주 봉착하게 된다.

3·1운동의 결과로 일제의 한국 지배가 곧바로 종식됐더라면 훨씬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한국 민중은 충분한 성과를 거뒀다. 자신들이 제국주의의 착취를 거부한다는 점, 자신들이 일제에 타격을 줄 역량이 있다는 점, 자신들이 일제로부터 독립된 존재라는 점을 충분히 표시했다. 3·1운동이 어딘가 환희에 찬 느낌을 풍기는 것은 한국 민중이 커다란 성과를 거뒀기 때문일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시위에... 윤기현·강경화의 용기

일제의 억압을 거부하고 응징하는 밝고 희망적인 3·1운동의 이미지는 수백·수천 명이 참가하는 대규모 시위뿐 아니라 수십이 참가하는 중소 시위가 곳곳에서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한 데서도 느낄 수 있다. 일경과 헌병대가 총을 쏘고 검을 휘두르는데도 전혀 개의치 않고 틈만 나면 두 팔 들고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국가보훈부의 전신인 원호처 산하의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삼일운동사>는 1919년 3월 27일 서울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적선동에서는 박흥준 등 약 50명이, 안국동에서는 박학준 등 약 30명이, 광화문통[세종로] 기념비각 부근에서는 김교승·김규정·정만성 등 약 50명이 각각 만세를 불렀으며"라고 기술한다. 이런 식으로 전국 곳곳에서 시도 때도 없이 시위가 일어났다.

3월 22일 밤 11시에 서울 단성사에서 영화 보고 나오던 관객들은 갑자기 만세를 불렀다. 상인들은 군경들이 다니며 "문 열어라", "장사해라"라고 협박해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더 큰 '이윤'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한국인들이 만세 외치는 일에 신명이 나고 환희가 넘쳤다는 점은 곳곳의 1인 시위로도 드러난다. 주변에 사람이 많건 적건 틈만 나면 나홀로라도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1인 시위로 볼 수 있는 이런 양상은 3·1운동 초기부터 나타났다. <삼일운동사>에 따르면, 고종황제 장례일인 3월 3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서울 파고다공원 동쪽에서 오흥순이 '국민회보' 문건 수십 장을 행인들에게 배포했고, 기독교 전도사 이병주는 정동교회 입구에서 교인들에게 독립선언의 취지를 설명했다. 진짜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의 윤기현(尹基鉉)은 운동의 열기가 많이 꺾인 1920년에 1인 시위를 했다. 본적이 인천인 그는 이때 스무 살이었다. 그해 2월 16일 밤 9시 30분경, 그는 지금의 서울역인 남대문역 대합실에 있었다. 3·1운동 1주년이 얼마 남지 않은 이날, 그는 열차를 기다리는 승객들 앞에서 갑자기 즉석연설을 시작했다.
 

2023년 3월 10일 오후 광주 남구 양림동 수피아여고에서 3·1 만세운동 104주년 기념 광주 3ㆍ10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가 열리고 있다. ⓒ 연합뉴스

 
그해 3월 26일자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즉석 연설의 핵심은 '청년들이 강우규 의사처럼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64세 된 강우규는 3·1운동 당시의 조선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물러나고 사이토 마코토가 새로운 총독이 되어 남대문역에 등장한 1919년 9월 2일 수류탄을 들고 남대문역을 찾아갔다.

그날 오후 5시, 사이토가 특별열차에서 내려 역 밖으로 나왔다. 강우규는 12.3미터까지 접근해 수류탄을 던졌다. 사이토는 죽지 않고, 총독부 및 일본군 간부를 비롯한 3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로부터 5개월 뒤 청년 윤기현이 동일한 역에 나타나 강우규를 본받자고 외쳤던 것이다. 위 판결문은 보안법 위반과 징역 6월을 선고하면서 윤기현의 행위를 이렇게 적시했다.

"피고는 대정 9년 2월 16일 오후 9시 반경 경성부 남대문역 대합실에서 당시 그 장소에 모여 있던 100여 명의 군중에게 '강우규는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져 조선민족을 위해 희생되었음을 알아야 하며, 우리 청년은 한층 분기하여 조선 독립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내용으로 연설을 하고 끝낸 다음에 대한독립 만세를 10회 정도 연거푸 부름으로써 치안을 방해한 것이다."

윤기현이 불특정 다수가 모인 데서 1인 시위와 즉석 연설을 했다면, 강경화(姜敬化)는 단체 행사 중인 1천여 명 앞에 나타나 똑같은 일을 했다. <삼일운동사>에 따르면, 그는 3·1운동 1주기가 지난 뒤에 서울의 유명 극장인 단성사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3월 27일 강경화는 수은동 단성사에서 불교 강연회 청중 1천여 명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여러 번 크게 불렀다."

이처럼 나홀로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국가보훈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 강경화·윤기현과 달리 독립유공자 지정을 받은 박홍기·박창룡도 이런 시위를 벌였다. <삼일운동사>는 1919년 서울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3월 30일에 박홍기는 종로3가 뒷골목인 장사동 어구에서, 4월 1일 박창룡은 낙산 위 산길에서 각각 단독으로 만세를 절규"했다고 설명한다. 골목 입구나 산길에서도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3.1운동, 패배의 역사가 아니다

2021년에 전북연구원이 발간한 <이거두리 설화>에 따르면, 1875년 생인 이보한(이성한)은 3·1운동 당시 서울 종로에서 전주까지 걸어가는 길에 계속해서 춤을 추며 만세를 불렀다. 또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라는 찬송가 구절을 함께 불렀다. 그래서 이거두리라는 전설적인 이름을 얻게 됐다. 그는 움직이는 1인 시위자였다. 이거두리 역시 독립유공자로 지정돼 있지 않다.

1920년에는 1년 전의 열기를 되살리려는 시도들이 많았다. 눈에 잘 띄는 곳에 태극기를 걸어둠으로써 1년 전의 함성을 생각나게 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삼일운동사>는 "이병철은 7월 15일 태극기를 만들어서 밤에 김을룡으로 하여금 충신동 낙산 꼭대기 나무 위에 이를 연 3일간 게양케 했다"고 기술한다. 윤기현과 강경화의 1인 시위 역시 그런 목적을 갖는 것이었다.

일제는 총칼로 시위대를 진압했다. 독립 만세를 부르면 총칼을 맞을 수 있었다. 그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강경화·윤기현 같은 이들은 1인 시위를 벌였다. 법적으로 보호되는 오늘날의 1인 시위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용감하게 나홀로 만세를 외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처럼 3·1운동 때는 한국인들의 피가 들끓었다. 그런 에너지가 전국적인 시위 현상으로 이어졌다. 이 운동이 희망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그런 에너지와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일제가 볼 때는, 3·1운동을 막아내고 총독부 권력을 지켰으므로 자신들이 선방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일제 국가권력이 어떻게 되든 관계없이 한국인들은 그들을 거부하고 응징했다. 응징을 한 쪽과 응징을 당한 쪽 중에서 누가 패자인지는 언급할 필요도 없다.

국가 중심주의 사고에서 벗어나서 3·1운동을 바라보면 이 사건은 한국 민중이 일제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사건이었다. 이것이 일제의 멸망으로 연결됐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대승리였다. 국가권력의 문법이 아닌 민중의 문법으로 보면, 이런 승리의 역사가 일제강점기 내내 곳곳에서 발견된다. 일제강점기 역사가 반드시 패배의 역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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