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05 09:04최종 업데이트 24.06.05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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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라 ⓒ 픽사베이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서 이제 '기도하라'다. 지금 종교와 종교인은 사회에서 점점 외면받고 있다. 우리나라만 해도 종교인 인구가 많았지만, 몇 년 전부터 비종교인 인구가 추월해 본격적인 세속화 사회에 접어들었다.

종교는 왜 외면당하는가?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종교가 본질에서 많이 벗어났다는 걸 사람들이 알아챘기 때문일 것이다. 본질에서 벗어난 것은 항상 외면받는다. 식당 주인이 영업은 하지만 관심이 다른 데 관심이 있다면 손님이 곧 알아차린다. 그러면 종교는 어떤 면에서 본질에서 벗어나는가?
 
첫째, 종교가 단지 신(초월적 존재)에 대한 예배와 신앙(종교활동)에만 머문다면 그건 종교의 존재 목적을 스스로 부인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사회학적으로 종교는 약함과 악함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인간이 그 한계를 돌파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종교나 신은 사람의 필요를 위해 스스로 만든 것이라는 면에서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 프로이트, 니체 등 사상의 대가들이 일치했다. 그런 면에서 인간의 실제 필요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종교 제도나 종교인이 갈수록 외면받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나 같은 신앙인은 종교와 신의 기원을 이와 다르게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의 실제 필요에서 전혀 벗어나 그 자체의 확장만 위해 존재하는 종교가 외면받는 건 당연하다는 결론에는 일치한다. 예수 자신도 안식일(종교 제도)을 위해서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다고 하였다(마가복음 3장 27절).

그러므로 진짜 신앙은 인간의 고민에 절대 무심하지 않다. 신에게 묻고, 따질 수 없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작가 박완서는 1988년에 생때같은 외아들을 갑작스러운 사고로 잃고 신에게 분노를 쏟아내고, 따지고 또 따졌다.

"주님, 당신은 과연 계신지, 계시다면 내 아들은 왜 죽어야 했는지, 내가 이렇게까지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건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말씀만 해보라고 애걸하리라."(한 말씀만 하소서, 박완서, 세계사, 102쪽)

그러나 아무리 부르짖고, 저주를 퍼부어도 속 시원히 대답하지 않는 무정하고, 잔인한 신의 존재를 그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다시 찾는다.

"온종일 신을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 번 고쳐 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 증오의 마지막 극치인 살의(殺意), 내 살의를 위해서라도 당신은 있어야 해."(박완서, 48쪽)

성경을 잘못 알고 있었다

그래서 종교인들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사연을 당해 통곡하며, 울부짖는 사람에게 너무 쉽게 '신의 뜻'을 운운하며, 적당히 넘어가려 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거듭된 참사로 가족을 잃은 이에게 냉대와 악담을 퍼붓는 종교인은 스스로 자격을 버린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아무것도 따지지 말고 무조건 믿고 복종해야 한다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성경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이와 무척 다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죽을 것 같은 상황을 만난 사람들이 따지듯이 거칠게 하나님을 몰아붙일 때 그는 꾸짖거나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주께서 나를 체포하시고, 주께서 내 적이 되셨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라고는, 피골이 상접한 앙상한 모습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범법자에게 넘겨 버리시며, 나를 악한 자의 손아귀에 내맡기셨습니다."(욥 16:10, 11)

"성읍 안에서 상처받은 사람들과 죽어 가는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도, 하나님은 그들의 간구를 못 들은 체하신다." (욥 24:12)


더구나 세상에서 악인은 당장 심판을 받기는커녕 갈수록 승승장구한다. 분노가 일어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으며, 몸은 멀쩡하고 윤기까지 흐른다. 사람들이 흔히들 당하는 그런 고통이 그들에게는 없으며, 사람들이 으레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아예 가까이 가지 않는다. …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모두가 악인인데도, 신세가 언제나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는구나.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시 73:4~5, 12~13)

우리가 이렇게 따져 물을 수 있는 모든 항의와 원망, 의심의 질문을 성경은 더 신랄하게 던지고 있다. 이런 기록이 있다는 건 인간으로서 우리가 마땅히 던질 수 있는 질문, 항의, 원망, 의심을 성경이 수용하고, 격려한다는 증거다. 우리는 성경을 잘못 알고 있었다.

종교의 타락은 항상 본질보다 종교인이나 제도에만 집중할 때 일어난다. 예나 지금이나 국민(백성)은 삶의 깊은 애환에서 허덕이는데 종교기관과 제도는 갈수록 화려해지고, 종교인은 다른 별천지에서 안락을 즐길 때 그 종교는 이미 망했다.

어떤 사람들에게 전광훈(그는 이미 자기 교단에서 목사 면직되었다)은 한국 사회와 기독교를 구할 선지자처럼 추앙되기도 한다. 그러나 보수나 진보를 넘어, 주변 지역의 아픔에는 아랑곳없이 자기 교회의 보상금만 더 받으려고 알박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던 행태는 그가 이미 거짓 선지자임을 증명한 것이었다.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실상은 그런 거짓 행태를 분별하긴커녕 말없이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신을 묻는 것은 곧 나를 묻는 것

둘째, 따라서 인간 사랑을 벗어난 신(하나님)만의 사랑은 없다. 예수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종교와 신앙이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요, 이유라고 말했지만(마태복음 22장 37~40절), 그건 예수만의 말씀은 아니었다.

웬만한 기독교인이라면 거의 동의하겠지만 성경에서 가장 재미없고 지루하기로 악명 높은 레위기가 있다. 레위기가 그런 오명을 벗지 못하는 건 대부분이 성전과 제사 제도의 기능과 제사장의 업무수행과 관련된 재미없는 기록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회와 백성의 실생활과 전혀 상관없는 종교 제도 자체의 유지, 발전에만 관심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정말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다. 실제로는 레위기의 모든 종교 제도가 사회정의와 백성의 실제적 필요와 충족에 직결되어 있었다. 예컨대, 현대 자본주의 정신은 영리 추구와 사유재산의 절대화를 자유와 발전의 핵심으로 내세우지만 3천여 년 전 레위기 법은 이를 거부한다.

'자기 밭을 추수할 때도 떨어진 열매를 다 거두지 말고, 오히려 설렁설렁 남겨두어서 땅 없는 사람들이 와서 부끄러움 없이 거둬가거나 들짐승이라도 먹게 두라.'(레위기 19:9~10, 25:4~7)

지금 한국 사회는 살아 있는 권력에는 무한정 관대하고 억울하게 죽은 목숨과 그 사연은 너무 가볍게 취급하여 피눈물을 뿌린다. 그런데 레위기는 마치 지금 한국 상황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재판할 때 불의를 행하거나 편들지 말고 공의로 하며, 특히 자기 이익을 위해 무고히 남의 목숨을 잡아서는 안 된다'(19:15~16)라고 경고한다.

또 온 세계가 갈수록 외국인, 특히 이민자와 난민에 대한 편견과 혐오가 판치고 있지만, 순혈주의의 온상인 줄 알았던 3천 년 전 이스라엘 법은 예측과 전혀 다르다.

"외국 사람이 나그네가 되어 너희의 땅에서 너희와 함께 살 때에, 너희는 그를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와 함께 사는 그 외국인 나그네를 너희의 본토인처럼 여기고, 그를 너희의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너희도 이집트 땅에 살 때에는, 외국인 나그네 신세였다."(레위기 19:33~34)

그러나 이 믿음을 이어받았다고 고백하는 현대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에 대한 또 다른 압제 왕국이 된 이해할 수 없는 현실도 우리는 함께 인정해야 한다. 레위기만 아니라 성경 곳곳에는 오늘날 봐도 낯설지 않을 정의와 평등, 인권, 평화의 말씀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모든 명령과 법규들은 세상을 지어 사랑으로 돌보는 하나님의 독특성과 관련이 있다고 선언한다. 그는 스스로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재판장이라 불리기를 즐긴다(시편 68장 5절).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인간의 유한성, 한계를 인정해 겸손하고 세상과 이웃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종교와 사상도 마찬가지다. 특히 동학사상도 '시천주(侍天主)', 곧 하늘(하나님)을 중심에 모시는 것에서 시작해, 사람이 곧 하늘이고, 사람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 하라는 '인내천사상(人乃天思想)'으로 이어진다. 그런 면에서 지금 종교가 외면받는 건 신(하나님, 종교)을 섬긴다는 핑계로 이웃과 세상 살피기를 외면한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아니할 수 없다.

우리가 신에게 세상과 인생을 묻고, 따지고, 항의한다는 것은 그저 종교에 속한 일이라고만 볼 수 없다. 그 자체가 세상을 열심히 살아보려는 몸부림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만 따져 물으면 안 된다. 따져 묻는 우리 자신은 과연 정당한지도 함께 자문해야 한다.

신을 묻는 것은 곧 나를 묻는 것이다. 그것은 이론적, 추상적 질문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향해, 왜, 어떻게 살아갈까를 포괄하는 근본적 질문이다. 종교와 신앙의 본질을 다음에도 계속 이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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