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08 17:44최종 업데이트 24.06.08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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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26일 압록강 초산에 도달한 국군 6사단 7연대 한 병사가 압록강 물에 수통을 담고 있다.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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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마저 헛발질... 잘못된 판단이 한국에 불러온 거대한 재앙 

다시 그 초산의 압록강 사진으로 돌아가 보자. 이 사진이 재현하려고 했던 승리의 감격과 통일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진의 이면에는, 아니 사진의 목전에는 승리가 아닌 패퇴가, 희망이 아닌 절망이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이 사진에는 "적군의 매복에 걸린 것도 모른 채 대통령에게 바친다고 강물을 수통에 담느라...'라는 사진설명을 붙일 수도 있다. 현장에서 사진을 촬영한 사진병이 퇴각하는 도중에 중국군에게 포로가 됐다는 사실이 당시의 급박한 전황을 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 순간 7연대뿐 아니라 6사단 전체가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은 수통으로 북위 40.8도의 압록강 수면을 터치만 하고는 38도도 아니고 37도까지 줄달음으로 후퇴를 한 셈이다. 1.4후퇴라는, 역전했다가 재역전을 당하면서 이 나라 이 땅은 전쟁이 발발할 때보다도 훨씬 위중하고 끔찍한 지옥판이 벌어졌다. 그 지옥의 전조가 이 사진의 뒷면에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의 참전

1950년 10월 15일 태평양의 작은 섬 웨이크섬에서 트루먼과 맥아더가 면담했다. 맥아더는 한국전쟁의 전황에 대해 낙관론을 폈고, 미군은 추수감사절(11월 23일)을 일본에서 즐길 것이라고 공언했다, 중국군에 대해서는 이미 시기를 놓쳐 개입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는 이틀 뒤에 정주-영원-함흥이었던 기존의 유엔군 북진 한계선, 소위 맥아더선을 선천-구성-풍산-성진, 곧 신맥아더선으로 북상시켰다. 

평양 점령 후에 유엔군 사령부는 낙관 일색이었다. 한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미2사단의 유럽 재배치를 계획하고, 미국에서는 극동으로 보낼 보충병을 취소하겠다고 극동군 사령부에 통보했다. 미8군 사령관 워커는 한국으로 반입될 탄약을 일본 보급창으로 돌리라고 요청했다. 장병들 역시 추수감사절을 일본에서 보낼 것이라는 기대에 들떠 있었다. 청천강 건너 잔적 소탕만 하면 전쟁이 끝날 것으로 모두 낙관한 것이다.

맥아더는 북진 한계선을 신맥아더선으로 밀어올린 일주일 후인 10월 24일 그 북진 한계선도 무시하고 전병력에게 중국 국경까지 최대 속도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다만 국경선 쪽으로는 한국군을 앞세우도록 했다. 이에 따라 미8군은 미24사단의 영국군 27여단을 신의주로, 국군 1사단은 수풍호로 진격하도록 했다. 우전방에서는 국군 6사단을 초산과 벽동으로, 8사단을 만포진과 중강진으로 진격하도록 했다. 이때 동부에서는 원산상륙작전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수도사단이 동북으로 진격했다.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에서부터 마치 경주대회를 하듯 빠른 속도로 북상할 때 중국은 이미 긴장감 속에 대비책을 강구해 왔다. 중국은 애초에 북한 김일성의 무력 통일에 유보적이었다. 국내문제가 산적한 신생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일성이 중국과 소련을 오가며 설득하자 결국 전면전 남침에 동의했다.

북한이 전면전을 일으키고 미국이 즉시 미7함대를 대만해협에 급파하자 중국은 자신들에 대한 위협이 다가오는 것으로 인식했다. 미국이 지상군을 본격적으로 투입하자 7월 15일 동북변방군을 편성하고 25만 병력을 동북으로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중국은 남한과 북한이란 인접국가의 상황에 일찌감치 군사적인 대비를 해온 것이다. 동북변방군은 8월 초 압록강에 접하는 안둥(지금의 단둥)과 지안, 퉁화와, 선양 인근의 번시 톄링 카이위안 등지에 집결했다.  

중국군 총참모부는 한국전쟁을 분석하며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북한에게 이에 대비하라고 두 차례나 권고했다.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한 다음에는 미국이 한중 국경과 중국으로 전쟁을 확대하려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미국에 경고를 연발했다. 

10월 1일 동아시아는 급박하게 돌아갔다. 맥아더는 북한에게 방송으로 항복을 권유했고, 국군은 38선을 돌파했다. 북한의 긴급지원 요청서는 스탈린의 책상에 도착했고, 김일성은 주북한 중국대사에게 파병을 요청했고, 박헌영은 베이징으로 급히 날아갔다. 

마오쩌둥은 10월 2일 참전을 기정사실화하고 사령관에 펑더화이를 선임했다. 10월 8일 동북변방군을 중국인민지원군으로 개칭하고 김일성에게 중국군의 출병을 통보했다. 중국은 10월 19일과 26일 두 차례에 걸쳐 18개 사단 20만 병력을 신의주 삭주 만포 세 곳에서 압록강을 건너게 했다. 중국군은 유엔군의 북진이 예상보다 빠르게 전개되자 작전을 변경했다. 서부지역에서는 청천강 북쪽의 산악지대에 3개 군단을 집중시켰다. 적유령 산맥 따라 정주-박천-군우리의 북쪽 20킬로미터 선에 전투배치를 완료했다. 

크리스마스의 참극
 

1950년 11월 24일 중국군 포로들 ⓒ 박도/NARA

    
유엔군은 중국군 20만이라는 대병력이 집결해 국경을 넘어오는데도 아무것도 몰랐다. 군사력 정보력이 세계 최강이었으나 중국군의 이동에 대해서는 완벽한 까막눈이었다. 맥아더는 서부전선에서 10월 24일 공격을 개시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국군 1사단은 창산장시에 접근하다가 전례 없이 강력한 저항에 부닥쳤다. 적군은 인민군이 아니라 중국군으로 식별됐다.

최초의 중국군 포로 한 명을 심문한 결과 자신이 속한 부대의 병력이 2만 명이라는 진술을 받아냈다. 유엔군은 포로를 평양으로 이송해서 세밀한 조사를 했다. 그러나 결론은 대규모 중국군 개입은 있을 수 없고, 개입했다 해도 수풍발전소를 방호하기 위한 수천 내지 수만 명 수준일 것으로 판단했다. 

유엔군의 판단이 이러했으니 북진공세를 멈출 리가 없었다. 국군 1사단 대신 미1군단의 예비인 미1기병사단을 투입했다. 그러나 전황은 악화되기만 했다. 낙동강 전선 돌파 이후 가장 강력한 저항에 직면한 것이다. 우측의 국군 2군단은 붕괴될 위험에 다다랐다. 공격은 실패하고 퇴로는 차단됐는데 증원부대까지 위험에 빠진 것이다. 

드디어 미1군단은 11월 1일 공세에 나선 전 부대에게 청천강 방어선으로 후퇴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좌측의 미8기병연대는 적중에 고립됐다. 2개 대대는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빠져나오기는 했으나 3대대는 완전히 포위됐다. 미8기병연대는 3대대 구출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3대대는 중국군의 집중 포위공격을 받아 800여 병력 가운데 530여 장병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됐다. 이 패전을 운산의 비극이라고 한다. 느닷없이 그러나 참담한 패배를 당한 것이다. 

11월 2일 국군 7사단은 1군단의 우측방인 비호산 방어에 나섰다. 혈전 끝에 방어에 성공했다. 곧이어 중국군의 2차 공격에 탈취당했다가 역공으로 재탈환했다. 이로써 청천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여기까지의 전투를 유엔군은 추수감사절 공세라고 하고, 중국군은 1차 공세라고 부른다.

이렇게 호되게 당하고도 유엔군 사령부와 미8군 사령부는 중국군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11월 5일 중국군이 전선에서 별안간 사라지고 북한 인민군의 경계부대만 출현했다. 유엔군은 이런 중국군의 속임수에 또 넘어갔다. 그때까지 입북한 중국군은 42만 명이었는데 맥아더는 고작 8만 명 정도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완벽한 제공권과 제해권을 믿은 반면, 중국군의 전투력은 경시했다. 아니, 중국 자체를 경멸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미8군은 후방의 미9군단까지 북상시켜 전선에 투입했다. 그러나 원산상륙작전으로 인해 서해상의 보급에 문제가 생겨 서부전선에서의 공격개시일을 미뤄야 했다. 미8군은 서둘러 진남포의 기뢰를 제거하고, 철도를 보수하는 한편, 공중보급을 늘려야 했다.

보급문제가 해소되자 11월 24일로 공격개시일을 다시 정했다. 맥아더는 장병들에게 이 공세로 전쟁을 끝내고 크리스마스는 고향에서 지낼 것이라고 공언하며 작전명을 크리스마스 공세라고 정하기까지 했다. 추수감사절 허언을 만회하려는듯 서양 최대의 경축일인 크리스마스를 당당하게 내세웠다. 결과는 크리스마스의 참극이 되고 말았지만.  

공격에서 방어로
 

중국 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후퇴하던 유엔군이 지쳐 쉬고 있다. (1950년 11월 29일) ⓒ 박도/NARA

 
유엔군이 크리스마스 공세를 준비할 때 중국군도 마찬가지로 2차 공세를 준비했다. 이를 위해 소련으로부터 차량 3천 대를 지원받아 보급문제를 대폭 개선했다. 이때부터 소련이 항공지원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1월 1일 미그기들이 미공군기들과 첫 공중전을 벌였다. 미국은 제공권에서 여전히 우세했지만 부분적으로 제한되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군은 2차 공세도 유엔군을 유인하고 반격하는 작전을 준비했다. 38만여 병력을, 서부(청천강 북쪽)에 18개 사단 23만 명, 동부(장진호와 그 서부의 산악지대)에 12개 사단 15만 명을 배치했다. 2차 공세에서 주공격 대상은 국군 2군단(6, 7, 8사단)이었다. 중국군의 공격개시일은 서부에서는 11월 25일, 동부에서는 26일로 정했다.

유엔군의 공격개시일은 11월 24일이었다. 첫날은 순조롭게 진격했다. 그러나 중국군의 공격개시일인 11월 25일 상황이 돌변했다, 강력한 충돌이 일어나면서 전진이 불가능했다. 오히려 그날 저녁부터는 중국군이 공세로 전환했다. 

미8군의 우익인 국군 2군단이 급속히 붕괴 위기에 빠졌다. 중국군은 국군의 지경선으로 병력을 투입해 지휘소를 급습해 혼란을 일으키고 후방을 차단하며 포위공격을 했다. 2군단의 7사단이 11월 26일 순식간에 붕괴돼 덕천-북창-순천으로 철수했다. 일부는 퇴로가 차단된 것을 모르고 있다가 미2사단 지역으로 철수하기도 했다. 국군 8사단도 지휘소가 기습을 당하고 후방을 차단당했다. 8사단은 주요 장비와 차량을 모두 파괴하거나 버려둔 채 소규모로 흩어져 포위망에서 탈출해야 했다. 

이때서야 유엔군 사령부는 중국군이 대규모로 참전한 사실을 인정하고는 "우리는 전혀 새로운 전쟁에 직면했다. 공격에서 방어로 전환한다"고 말했다. 11월 28일 동경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다. 서부는 우측방을 방어할 정도로 평양까지 충분히 후퇴하고, 동부는 함흥 흥남의 교두보까지 철수하기로 했다. 순식간에 평양~원산 방어선으로 밀린 것이다.

11월 29일 전선은 계속 악화됐다, 이번에는 미2사단이 포위됐다. 이때 우측방인 국군 2군단이 붕괴되어 중국군이 군우리와 순천으로 진격해 오자 터키여단에게 이를 저지하라는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터기여단도 후방이 차단되면서 포위됐고, 그 자리를 지키며 처절한 지연전을 펼쳤다. 터키여단은 이 전투에서 병력의 3분의 1 이상을 잃는 참극을 당했다.  

군우리의 미2사단은 상황은 더 심각했다. 군우리에서 순천으로 철수하라고 명령이 내려왔지만 군우리-순천 10킬로미터 도로 양측은 이미 중국군이 매복하고 있었다. 다른 길은 없었다. 계속 공격을 당해 숱한 사상자를 내면서 죽음의 퇴각을 해야 했다. 미2사단의 사상자는 3천여 명에 달했고, 사단의 모든 장비는 버릴 수밖에 없었다. 참극도 이런 참극이 없었다. 미군은 이 퇴각행군을 인디언 태형이라고 부르며 자책해야 했다. 

동부에서도 유엔군은 11월 27일 공세에 나섰으나 첫날부터 강력한 역공에 부닥쳤다. 곳곳에서 퇴로가 차단되고, 포위되기 시작했다, 미해병 1사단은 장진호 부근에서 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해야 했다. 이때 혜산진으로 진출한 미7사단과 동북의 국군 1군단도 공격을 중지하고 방어로 전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평양-원산 선으로 철수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처절한 철수
 

ⓒ 이은영

    
동부전선의 철수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청진까지 진격했던 국군 1군단은 해안으로 480킬로미터를 후퇴해야 했다. 혜산진에 까지 진격했던 미7사단은 산악지대를 320킬로미터나 이동해야 했다. 국군 1군단은 다행히 큰 저항 없이 성진까지 후퇴해서 미군 함정을 이용해 흥남으로 후퇴했다.

장진호의 미해병 1사단이 문제였다. 미해병 1사단은 크리스마스 공세로 11월 25일 유담리까지 진출했으나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히고는 방어로 전환했다. 혹한 속에 악전고투를 이어가다가 철수명령이 떨어졌다. 12월 6일 철수를 개시했다. 후퇴하면서 필히 지나야 할 황초령은 이미 중국군 수중에 떨어져 있었다.

파괴된 수문교를 복구하는 것도 난제였다. 조립교 6개를 공중투하로 받아서 그야말로 필사적으로 설치했다. 강력한 화력지원 속에 중국군을 겨우겨우 돌파하며 철수했다. 그러나 전사자와 사상자가 2621명이나 발생했다. 이 가운데 1534명이 동상 환자였다. 참혹한 전투, 처절한 철수였다. 

가장 큰 실책은 정보의 실패였다. 운산의 비극(미8기병연대)에서 인디언 태형(미2사단)과 장진호 철수(미해병1사단)까지, 이런 참패는 곧 장병들의 떼죽음이었다. 전선의 장병들은 자신들의 잘못으로 죽은 게 아니다. 미국의 국방부와 국무부 그리고 함동참모본부는 물론 유엔군과 국군의 지휘관들까지 모두, 중국군 참전에 대해 치명적으로 오판했다.  

유엔군이 실제 중국군과 부닥치기 20여 일 전인 9월 30일 중국 외교부장 저우언라이는 북한이 침공을 당하면 방관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10월 3일 주중 인도대사를 불러서는 한국군이 아닌 군대가 38선을 넘으면 군대를 파견할 것이라고 미국에게 경고했다. 이런 발언에 대해 미국 워싱턴의 국무부와 국방부, 일본 도쿄의 고급 참모들은 중국군의 개입이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완벽하게 틀렸다. 

맥아더가 10월 15일 자신의 상관인 대통령 앞에서 자신만만하게 승리와 추수감사절 파티를 운위하고 있을 때 중국군은 이미 세 곳에서 압록강을 넘어와 전투배치를 끝내고 있었다. 맥아더가 10월 24일 한중 국경으로 최대 속도로 진격하라고 명령했을 때 중국군은 20만 병력이 입북해 적유령 산맥에 매복하고 있었다. 정보의 실패 때문에 맥아더는 유엔군 주력부대를 중국군이 파놓은 함정으로 제 발로 들어가게 한 것이다.

미8군의 선봉인 국군 6사단 7연대가 압록강에 도달하는 순간까지 중국군은 참전하지 않을 것으로, 중국군 포로를 잡아 신문을 했어도, 수풍댐을 방호하는 정도의 소규모 참전인 것으로, 일차 크게 패퇴하고도 중국군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기존의 오판을 고집하면서 찢어진 곳을 부실하게 기우기만 했다. 그리고는 다시 공세를 펼쳤다가 참패를 당한 것이다. 청천강에서의 참패는 바로 평양-원산으로, 다시 38선으로 후퇴하게 했다. 급기야 수도 서울을 다시 포기하는 1.4후퇴로 연쇄폭발을 일으켰다. 

인천상륙작전의 승리와 낙동강 돌파 이후 거침없이 북진했지만 유엔군 상부와 내부에서는 자만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었다. 쪼그라든 북한 인민군만 노려보았을 뿐 그보다 훨씬 규모가 큰 중국군을 보지 못했다. 중국군이 입북해 전선에서 충돌할 때에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런 참패는 중국군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크리스마스 파티를 공언한 전쟁 지휘부, 맥아더와 그의 엘리트 참모들의 정보의 실패에서 온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힘이 약하면 상대방의 허언같은 발언에도 겁을 먹지만, 힘이 강하면 상대방을 보지 않고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상상하기 쉬운 법이다. 1등이 2등으로 추락하는 것은 2등이 1등을 넘어뜨려서가 아니다. 1등이 자만에 빠져 스스로 주저앉으니 2등이 1등이 되는 것이다.

세계 최강 미국의 군대는 유엔이란 국제사회의 조직과 명분까지 동원했지만, 스스로 오만에 빠져 2등도 아닌 신생국가 중국에게 참패를 당한 것이다. 참패는 참패로 끝나지 않고 우리에게 패전 이상의 살이 찢겨지는 이산과 피를 뿜어대는 살육이라는 엄청난 비극이 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초산의 압록강 사진이 던져주는 세 번째 이야기다.
 

1951년 1.4 후퇴 피란민 행렬로 고갯길에서 사람과 소달구지가 뒤섞인 채 아수라장이 됐다. ⓒ 박도/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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